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부족 공국 (문단 편집) === [[슈바벤]] 공국 === 슈바벤은 로마 제국이 '알레마니아'라 불렀던 지역으로, 현재 독일의 [[바덴-뷔르템베르크]]주를 중심으로 그 주변에 있는 독일어권 [[스위스]], [[알자스]], [[바이에른]]의 서부 지역([[아우크스부르크]] 이서 지역), [[티롤주|오스트리아 티롤]]의 서부 지역 등을 포함한 영역이었다. 슈바벤은 최소한 3세기 이전에 마인 강 유역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수에비|슈바벤족]]([[알레만니|알레마니족]])이 처음 역사에 기록된 것은 213년 [[카라칼라]] 황제 시절 [[세베루스 왕조]] 로마 제국과 전쟁을 벌이면서부터였다. 이후 4~5세기에는 독립된 왕국을 이루다가 5세기 말에 [[메로베우스 왕조]] 프랑크 왕 [[클로비스 1세]]와의 전쟁에서 패배하고 프랑크 왕국에 귀속되면서 슈바벤 공국이 되었다. 하지만 클로비스 1세 사후 메로베우스 왕조 프랑크 왕국이 분할 상속으로 쪼개어지고 약화되면서, 슈바벤은 프랑크 왕국으로부터 반독립적인 성격을 유지하게 되었고, 독립을 위한 반란도 여러차례 일으켰다. 그러다가 프랑크 왕국이 [[카롤루스 왕조]]로 교체되고 [[카롤루스 대제]]가 등장하면서 다시 프랑크 왕국으로의 예속이 강화되었다. 프랑크 왕국이 분열된 후 슈바벤 공국은 동프랑크 왕국을 거쳐 [[독일 왕국]]의 5대 부족 공국 중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슈바벤 공국은 이웃한 프랑켄 공국과 비슷하게 여러 가문들이 영지를 나눠 차지하게 되면서 슈바벤 공작의 지위는 점차 약해졌다. 11세기 경 슈바벤 공국 내에서 강력했던 세력은 [[호엔슈타우펜 가문]], [[벨프 가문]], [[합스부르크 가문]], 체링겐 가문 등이었다. 공교롭게도 이들 가문 중 상당수는 나중에 제위에 오르면서 황실이 되었지만 11세기 당시에는 다들 백작 가문에 불과했다. 한편 체링겐 가문이 다스리던 [[바덴]] 지역이 1112년 바덴 변경백국으로 분리되어 나가면서 슈바벤 공국의 범위는 더욱 줄어들었다. 1079년 [[호엔슈타우펜 가문]]이 슈바벤 공작을 차지하게 되었다. [[호엔슈타우펜 가문]]은 12세기부터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를 차지하게 되었지만, 이 가문 출신 황제들이 이탈리아 경영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이탈리아 원정을 위해 장기간 독일을 비우게 되었고, 이로 인해 슈바벤 지역에서는 황제에 대항하는 반란이 많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후 사정은 더욱 악화되었는데 [[호엔슈타우펜 가문]]이 [[시칠리아 왕국|시칠리아 왕위]]까지 차지하자 황제들이 아예 기후도 좋고, 이탈리아를 도모하기에 좋은 시칠리아 섬에 눌러 살기 시작한 것이었다. 슈바벤 지역에서는 더욱 반황제 반란이 빈번하게 일어났고, 결국 이러한 반란들과 교황의 견제, 그리고 집안의 내분 등이 겹치면서 호엔슈타우펜 가문은 급속히 몰락했으며, 제국은 [[대공위 시대]]에 접어들었다. [[대공위 시대]]에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마지막 당주였던 소년왕 [[콘라딘]]이 [[카페 왕조]]의 방계인 [[카를루 1세|앙주의 샤를]]로부터 [[시칠리아 왕국]]의 왕위를 되찾기 위해 1266년 슈바벤 공국을 담보로 군자금을 마련하여 [[이탈리아 반도]]로 원정을 떠났다. 하지만 콘라딘이 1268년 탈리아코초 전투에서 앙주의 샤를에게 패배해 참수당하면서 호엔슈타우펜 가문은 단절되었고, 저당잡혀 있었던 슈바벤 공국이 여러 제후들에게 분할되면서 '''슈바벤 공국은 해체'''되고 말았다(1268년). 1268년 [[호엔슈타우펜 가문]]이 단절된 후 여러 제후들이 슈바벤을 나누어 차지하게 되었는데 그중에서도 [[합스부르크 가문]], 뷔르템베르크 가문, [[비텔스바흐 가문]]이 두드러졌다. 특히 [[합스부르크 가문]]은 슈바벤 남부의 [[스위스]] 지역을 비롯하여 슈바벤에서 가장 넓은 영지를 보유하게 되었다. 때마침 대공위 시대가 끝나면서 [[독일왕]]으로 선출된 [[합스부르크]] '''백작''' 출신 [[루돌프 1세]]는 슈바벤 '''공작''' 작위를 차지하여 가문의 위상을 드높이려 했다. 그러나 이미 슈바벤이 여러 가문에 의해 쪼개져 있는지라 슈바벤 공작 작위의 권위는 크게 실추되어 있었다. 게다가 슈바벤의 남부를 차지하고 있었던 [[스위스]]가 독립운동을 일으킨 것은 결정타였다. 스위스는 [[합스부르크 가문]]과의 약 25년간에 걸친 항쟁 끝에 1315년 사실상 독립을 쟁취하게 되었다. 스위스가 독립하자 슈바벤에서 합스부르크의 영지는 크게 줄어들었고, 합스부르크 가문은 1313년 슈바벤 공작 작위를 스스로 폐지해 버리고 말았다. 이후 합스부르크 가문은 수많은 월경지로 쪼개진 슈바벤 영지에 관심을 잃고, 대신 새로 획득한 동부의 [[오스트리아 공국]]을 가문의 중심지로 삼게 되었다. 1315년 스위스가 독립해 나간 이후 남은 슈바벤 영토에서 가장 넓은 영지를 보유하게 된 가문은 뷔르템베르크 가문이었다. 1083년 슈바벤의 중심지역인 [[슈투트가르트]]를 중심으로 시작된 뷔르템베르크 백국은 1495년 뷔르템베르크 공국으로 승격되었다. 한편 1500년~1512년의 제국 개혁으로 제국 관구가 생길 때 슈바벤 지역은 '슈바벤 관구'로 지정되었다. 뷔르템베르크 가문의 힘이 더욱 강해지면서 이 지역은 슈바벤 대신 뷔르템베르크로 불리기 시작했다. [[나폴레옹 전쟁]] 때 독일에서 [[프랑스 제1제국]]과 인접해 있었던 뷔르템베르크 공국은 프랑스군의 침략을 받아 나폴레옹 1세에게 굴복한 후 그에게 협력하게 되었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나폴레옹에 의해 뷔르템베르크 왕국으로 승격되었고, 구(舊) 슈바벤 지역에 잔존해 있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월경지들을 신나게 공격하여 합병함으로써 나폴레옹을 기쁘게 했다. 나폴레옹이 몰락한 후 [[빈 회의]]에서 합스부르크 가문 월경지 반환 문제에 대해 합스부르크 가문이 관리가 어렵다면서 의외로 쿨하게 포기해버리고 남방의 다른 영토를 대신 획득하면서 뷔르템베르크 왕국은 합스부르크 월경지의 점유를 인정받아 구(舊) 슈바벤 지역의 영토를 거의 통일하게 되었지만 동쪽의 일부 영토는 [[바이에른]] 공국에게 할양해야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